인류에게 설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준 과학자 이야기

인류에게 설탕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준 과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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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은 기원 전 4세기 경, 인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사탕수수 수액에서 뽑아낸 이 달콤한 하얀 가루는 기원 전 2세기에 유럽에 처음으로 전해졌고, 모든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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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사탕수수는 유럽의 기후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다. 바다를 건너 수입되는 설탕의 가격은 너무나도 비쌌다. 



이 점을 이용해 18세기 카리브 해 식민지에 대규모 설탕 농장을 구축한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설탕공급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당시 설탕 생산국이 된다는 건, 오늘날 산유국의 지위에 오르는 것과 똑같은 뜻이었다.

 



(프랑스령 생도맹그에서 생산되던 설탕으로 버는 돈이 당시 프랑스 1년 재정의 1/3을 차지했을 정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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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프로이센의 화학자 안데르스 마르그라프(Andreas Sigismund Marggraf)는 현미경으로 사탕무(sugar beet) 조각을 들여다보다가 당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유럽에서 사탕무는 사람이 먹지 않고 가축사료로나 재배하던 쓸모없던 식물이다.  다만 6%가 당성분이라서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동시기 조선에서도 사탕무를 가리켜 단무우라고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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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마르그라프의 제자였던 프란츠 아카드 (Franz Karl Achard)는 스승의 기록을 뒤져보다가 사탕무에 대한 연구결과를 보게 됐다. 그는 이 기록을 보고선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 해낼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다.

 



사탕무는 열대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오히려 북유럽 같은 추운 기후에서 잘 자라는 특성을 가진 식물이었다.  아카드는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사탕무 종자를 재배했으나, 불이 나서 농장이 타버리는 바람에 연구가 실패함.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연구를 다시 재개할 자금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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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설탕생산이라는 단어에 솔깃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3세의 지원으로 1801년 그는 슐레지엔의 쿠네른(Kunern)에 세계 최초의 사탕무 정제 공장을 세운다. 당시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였지만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엄청나게 빈약한 산업구조로 인해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척박한 독일 땅에서 설탕을 만들어낼수 있다면, 나라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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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노력 끝에 아카드는 마침내 400톤의 사탕무를 가공하여 16톤의 설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아카드는 프로이센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으로 독일땅 여기저기 사탕무 공장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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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제국과 전쟁을 벌인 프로이센은 연전연패하며 영토와 배상금을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프랑스의 따까리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카드의 사탕무 공장들은 프랑스군에게 약탈 당해 모두 불타버린다. 아카드는 또 다시 실패했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띠껍게 굴던 영국을 말려죽이기 위해 유럽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이로 인해 유럽으로 들어오던 설탕의 품귀현상이 벌어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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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탕은 사치품이었지만, 돈 많은 귀족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 파티의 달콤한 디저트부터 차와 커피에도 넣어마셨다. 당장 자신들이 먹을 설탕이 필요했던 유럽인들은 절박해졌다. 그러던 중, 왠 프로이센 촌놈이 무에서 설탕을 뽑아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카드의 시골집에는 나폴레옹이 보낸 프랑스 조사단을 필두로 온 유럽의 과학자들이 찾아와 사탕무 제조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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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대로 영국에서도 손님이 왔다. 설탕으로 부를 축적하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가성비가 좋은 경쟁상품이 나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들은 아카드에게 20만 탈러 (요즘 환율로 21억원)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사탕무 제조법을 파기해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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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카드는 설탕농장주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공장 옆에 학교를 세워 자신을 찾아온 과학자들에게 사탕무 제조법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아카드의 사탕무 제조법을 배워간 사람들은 유럽 곳곳에 사탕무 공장을 세워 설탕을 생산해내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 영국산 설탕에 의존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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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설탕생산량의 절반을 사탕무가 차지하게 됐다. 설탕은 더 이상 부유층들의 사치품이 아닌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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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류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제조법을 공개했던 아카드는 공장과 돈을 모두 잃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의 사탕무 공장은 모두 파산했고 제조법을 가르치던 학교도 1815년에 문을 닫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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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카드는 1821년 슐레지엔에 있는 자신의 초라한 초가집에서 빈곤과 폐렴에 시달리며 숨을 거두었다. 





아카드는 분명 사탕무가 엄청난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사탕무 제조법을 특허출원해서 그에 대한 로열티라도 받았다면, 양심도 챙기고 최소한의 돈이라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드가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은 한가지 신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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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탕이 주는 이 달콤한 기쁨을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누리기를 원합니다.



 



신께서도 분명히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사탕무라는 위대한 작물을 내려주셨을 겁니다."




 



Franz Karl Achard (175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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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마진코리아박팀장 2021.05.31 16:29  
장문은 못읽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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